우리들 이야기

도덕경(道德經)

이천이 2011. 1. 27. 09:33



도덕경(道德經)


제1장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도란 무엇인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無名 天之地始 有名 萬物之母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故 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徼 고 상무 욕이관기묘 상유 욕이관기요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차양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衆妙之門 중묘지문 '도'라고 할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하늘과 땅의 시원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온갖 것의 어머니 그러므로 언제나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을 볼 수 있고 언제나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근원은 같은 것 이름이 다를 뿐 둘 다 신비스러운 것 신비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입니다. 해설 제1장은 '도道'에 대하여 기본적인 것을 말해 주고 있는 장이다. 그래서 하상공河上公은 이 장을 체도體道의 장이라고 불렀다. '도'의 본질을 말해 주는 장이라는 뜻이겠지만, 첫 장인 이 장만 잘 이해해도 '도덕경'의 반 이상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장이다. '도'란 무엇인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도'란 '차도'니 '인도'라고 할 때와 같이 물리적인 길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도' 같이 인륜을 나타내는 윤리적인 뜻의 도리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감지 할 수 있고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원한 도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의미의 무엇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라고 꼭 집어 말해주지는 않는다. '도'란 직관과 체험의 영역이지 사변과 분석과 정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모든 다른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궁극실재 혹은 절대적 실재는 우리의 제한된 표현을 초월한다는 주장이다. '도'라든가 뭐라고 이름이나 속성을 붙이면 그것은 이미 그 이름이나 속성의 제한을 받는 무엇으로서 절대적인 '도'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무명無名 혹은 무無 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처음부터 너무 추상적으로 된 것 같다. '도'를 영어의 'The Way' 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더 쉽게 들릴지 모르겠다. 'The Way' 라고 했을 때 'The Way things are' 혹은 'The Way the whole universe is or is working'쯤으로 생각하면 뭔가 감이 좀 잡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주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무엇, 그리고 그것이 움직이도록 하는 기본 원리, 그것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것도 존재하거나 움직일수 없는 우주의 기본 원칙 같은 것, 그런 의미로서의 'The Way' , 그런 의미로서의 '궁극 실재' 라 생각해 볼 수 있다. '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드러나 보이지도 않는 신비의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이름 붙일 수도 있고 드러나 보이기도 하는 현상의 측면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실상實相의 세계로서 무명無名 혹은 무無의 세계요, 후자는 현상現象의 세계로서 유명有名 혹은 유有의 세계다. 무無라고 해서 물론 전혀 아무것도 없는 헛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보통으로 존재하는 유有와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보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의 무無이다. 영어로는 보통의 'being'dl dkslfksms Emtdptj 'non-being'이요, 보통의 'thing'이 아니라는 뜻에서 'no-thing', 'Nothing'이다. 만일 우리가 '욕심을 비우고', 깊은 형안을 갖데 되면 전자인 실상계의 신비를 직관하게 되지만, '욕심을 가지고' 사는 한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계만을 감지하고 살 뿐이라고 한다.(이 부분은 달리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풀기로 한다) 실상계든 현상계든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도'라는 한 가지 근원에서 나온것,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신비 중의 최고 신비라는 것이다.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 보라. 어찌하여 흑암의 공허만이 아니라 만물이, 그리고 내가 이렇게 존재한단 말인가? 조용히 생각해 보면 실로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그러기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상가가 공통적으로 '도대체 어찌하여 허공만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인가? (why are there beings at all, rather than nothing?)' 하는 질문을 계속했고, '존재의 신비(mystery of being)'니 '존재의 충격(shock of being)'이니 하는 말로 그 신비로움을 표현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스럽다.'고 했다. 존재의 신비, 존재의 충격이 이러하거늘 존재(being)를 가능하게 하는 비존재(non-being)의 신비, 그 비존재의 충격이야 어떠하겠는가? '도덕경'은 이렇게 존재계의 신비, 그리고 그 존재의 영역을 포함하고 통괄하면서 그 근본 바탕이 되는 비존재계의 신비, 이런 '신비의 문' 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차분한 마음으로 이 초대에 응해보자. - 老子원전ㆍ오강남 풀이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