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생사일여(삶과 죽음은 하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조물주가 준 생명이니 귀하고 ...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의 법에 의한 나의 삶은 헛되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삶과 죽음이 따로 따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
인연법에 따라서 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는 뜻이며
삶을 가치 없는 것으로 보라는 뜻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원래 시작도 끝도 없다.
사는 것은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은 사는 것.
부처님이 버려야 할 인식으로 대표적으로 4가지를 설하셨습니다.
1. 나와 세상이 영원하다는 인식으로 常想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전도망상의 하나입니다.
2. 일어났다 소멸하는 즐거움을 즐거움이라고 보는 樂想입니다.
이것이 전도망상의 하나입니다.
3. 영원불변하는 참나 진아 우주아 대아 아트만 영혼 수자상 인상이 있다는 생각으로 我想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전도망상의 하나입니다.
4. 일어났다 소멸하는 깨끗함을 지극히 청정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淨想입니다.
이것이 전도망상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중생들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연기법을 바르게 보지 못함으로서 가지게 되는 4가지 전도망상으로 수행자와 성인과 부처님은
이러한 전도망상을 여의고
무상
고
무아
부정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보았을때 해탈열반을 이루게 되어
항상하고 즐겁고 무아이고 청정한 열반을 얻고
열반에 들어 세간을 연민하며 성인의 삶을 살게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불법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 있지요.
이 말은 곧 우리가 깨닫든 깨닫지 않든 만물은 이미 공이고 색이란 뜻입니다.
고로, 깨달을 것이 없었다 하는 말이 나오게 된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지만 실은 그 삶 자체가 공한 것이고,
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깨달으면 이러한 경계 자체가 없어지겠지요. 그러나
경계가 없어진다는 것 역시도 공이므로,
깨달아도 그만 안 깨달아도 그만이라고 하지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것 자체가 영원이고 순간입니다.
이것이 '공사상'입니다.
고로,
삶이 죽음보다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 가치가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치있게 살아가자면 인연대로 따라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삶과 죽음을 정말 하나로 보았다면
자살을 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삶에 대한 집착이므로,
이러한 겸허한 마음과 자살하고자 하는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 앞에서도 그것을 짊어지고 묵묵히 가던 길을 걷는 것이고,
죽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도덕관'입니다.
생사일여라는 말은 앞서 공사상을 설명하였기에 이해하셨으리라 믿고,
불교식 도덕관은 이 공사상 그늘에 가려있는 것이기에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중생은 열반을 모르니 고통에 들어 무명업을 지고 생을 마감하게 되는바 법계의 방편을 나투어 중생을 제도하고자 이름을 설하는바 본래 이름은 중생과 한몸이라 하겠읍니다
중생이 아프니 보살이 병들어 있는 그곳이 생사가 뚜렷하며 생사를 벗어난 곳 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이미 열반에 들었으며
중생은 열반을 모르니
나무 승 이라 합니다
자살이 이름된 세상에 오신이들 있사온데
자살이라 연유된 것은 살아갈수 있음에도 중생을 위하여 인연된바를 알아서 생을 버린
석가모니 예수 성인들을 들을수 있겠읍니다
어떤이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철길에 몸을 던져
한생명을 구하고 세상을마감하는데
이사람은 구하는 이가 종교가 무언지 따지거나 배운바 지식이나
학식이나 명예를 보거나 하지않으며
스스로 죽는 자살의 업을 감수합니다
또 다른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회피하는 죽음 자살은 업의 윤회를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생이 돌이키는 그곳이 열반처요 윤회는 끊어지고 아미타불의 미소를 마주 하니
삼계가 하나이고 본래 부처는 돌이킴을 스스로 갖추어 인연을 따른것을 아는바
단 하나도 버릴것이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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