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
[스크랩]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천만리 할아버지
이천이
2011. 3. 31. 17:12
조선왕조실록에 천만리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몇번 나옵니다.
그중에서 고종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영양천씨는 뼈대있는 집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고종 41권, 38년( 1901 신축 / 대한 광무(光武) 5년) 9월 30일 양력 2번째기사
천만리에 대한 시호 제수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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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관(議官) 이봉래(李鳳來)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명(明) 나라 수위사 겸 총독장(守衛使兼總督將) 천만리(千萬里)는 만력(萬曆) 임진년(1592)에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로서 철기(鐵騎) 2만 명과 아들 천상(千祥)을 거느리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곽산(郭山)에서 첫 싸움을 하여 이긴 다음 평양(平壤)으로 진군하여 주둔하고 있는 적을 포위하였습니다. 제독이 천만리와 함께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했는데, 대포로 문짝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 승세(勝勢)를 타고 싸운 결과 1,280여 급(級)을 참획(斬獲)하였습니다. 계속 싸우면서 동래(東萊)에까지 이르는 동안 연전연승함으로써 적의 예봉을 꺾어놓았습니다.
정유년(1597)에는 또 중사마(中司馬)로서 와서 일본 군사와 직산(稷山)에서 싸웠는데, 매복하였다가 들이치자 적들은 풀대 쓰러지듯 하였으며 울산(蔚山)까지 도망치는 적을 승세를 타서 곧바로 무찔러 버리고 그 공로를 서생진(西生鎭)의 층암절벽에 새겼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돌아가게 되자 그대로 왕경(王京)에 머무르면서 금강산(金剛山)에 세 번 가보고 두류산(頭流山)에 두 번 올랐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읊어 감회를 털어놓았습니다. 대체로 그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이국 땅의 고신(孤臣)이 된 것은 명나라가 마지막 운수에 들어서고 중국이 오랑캐 땅으로 되리라는 것을 환히 알아서 후손들이 오랑캐 땅에 들어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선묘(宣廟)는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토지 30결을 주었으며, 숙묘(肅廟)는 대보단(大報壇)에 종향(從享)하도록 명하였고, 순묘(純廟)는 정해년(1827)에 신주(神主)를 부조(不祧)114) 하도록 하였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예우(禮遇)한 은전(恩典)이 극진하였다고 이를 만하지만 아직 역명(易名 : 賜諡)의 은전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김영목(金永穆)이 시장(諡狀)을 장례원(掌禮院)에 올렸건만 방치하고 보고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의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절혜(節惠)를 베풀어 풍속을 바로 세우고 공로를 장려하는 수단으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사(疏辭)를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영인본】 3책 225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군사-전쟁(戰爭)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기(軍器) / *외교-일본(日本)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풍속-풍속(風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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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4]부조(不祧) : 나라에 큰 공훈(功勳)이 있는 자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祠堂)에 모셔 제사 지내게 하는 특전(特典). ☞
그중에서 고종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영양천씨는 뼈대있는 집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고종 41권, 38년( 1901 신축 / 대한 광무(光武) 5년) 9월 30일 양력 2번째기사
천만리에 대한 시호 제수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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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관(議官) 이봉래(李鳳來)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명(明) 나라 수위사 겸 총독장(守衛使兼總督將) 천만리(千萬里)는 만력(萬曆) 임진년(1592)에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로서 철기(鐵騎) 2만 명과 아들 천상(千祥)을 거느리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곽산(郭山)에서 첫 싸움을 하여 이긴 다음 평양(平壤)으로 진군하여 주둔하고 있는 적을 포위하였습니다. 제독이 천만리와 함께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했는데, 대포로 문짝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 승세(勝勢)를 타고 싸운 결과 1,280여 급(級)을 참획(斬獲)하였습니다. 계속 싸우면서 동래(東萊)에까지 이르는 동안 연전연승함으로써 적의 예봉을 꺾어놓았습니다.
정유년(1597)에는 또 중사마(中司馬)로서 와서 일본 군사와 직산(稷山)에서 싸웠는데, 매복하였다가 들이치자 적들은 풀대 쓰러지듯 하였으며 울산(蔚山)까지 도망치는 적을 승세를 타서 곧바로 무찔러 버리고 그 공로를 서생진(西生鎭)의 층암절벽에 새겼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돌아가게 되자 그대로 왕경(王京)에 머무르면서 금강산(金剛山)에 세 번 가보고 두류산(頭流山)에 두 번 올랐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읊어 감회를 털어놓았습니다. 대체로 그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이국 땅의 고신(孤臣)이 된 것은 명나라가 마지막 운수에 들어서고 중국이 오랑캐 땅으로 되리라는 것을 환히 알아서 후손들이 오랑캐 땅에 들어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선묘(宣廟)는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토지 30결을 주었으며, 숙묘(肅廟)는 대보단(大報壇)에 종향(從享)하도록 명하였고, 순묘(純廟)는 정해년(1827)에 신주(神主)를 부조(不祧)114) 하도록 하였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예우(禮遇)한 은전(恩典)이 극진하였다고 이를 만하지만 아직 역명(易名 : 賜諡)의 은전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김영목(金永穆)이 시장(諡狀)을 장례원(掌禮院)에 올렸건만 방치하고 보고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의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절혜(節惠)를 베풀어 풍속을 바로 세우고 공로를 장려하는 수단으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사(疏辭)를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영인본】 3책 225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군사-전쟁(戰爭)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기(軍器) / *외교-일본(日本)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풍속-풍속(風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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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4]부조(不祧) : 나라에 큰 공훈(功勳)이 있는 자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祠堂)에 모셔 제사 지내게 하는 특전(特典). ☞
출처 : ★천★씨들은 다모여라!
글쓴이 : 천학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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