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

원효대사 [元曉, 617~686.3.30]

이천이 2010. 12. 4. 09:38

요약 : 신라의 승려로 당나라로 가는 유학길 중 간밤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대오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평생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썼으며 한국 불교사상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별      칭 :  아명 설서당 ·설신당, 소성거사 ·복성거사
활동분야 :  종교
주요저서  : 《대혜도경종요》《법화경종요》

 

 

본문 : 속성 설(), 법명 원효, 아명 서당()·신당()이다. 압량(:)에서 태어났다. 설총()의 아버지이다. 648년(진덕여왕2)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가산을 불문에 희사, 초개사()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에 이르러 한 고총()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도 부정()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대오()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후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 · · 등으로도 불린다)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 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로 단정,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 ·복성거사()라 자칭, 《무애가()》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또 당나라에서 들여온 《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 존경을 받았다. 그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저서에 《대혜도경종요()》 《법화경종요()》 《화엄경소()》 《대열반경종요()》 《해심밀경소()》 《대승기신론소()》 《대승기신론별기()》 《대무량수경종요()》 《아미타경소()》 《미륵상생경종요()》 《금강삼매경론()》 《보살영락본업경소()》 《범강경보살()》 《계본사기()》 《보살계본지범요기()》 《중변분별론소()》 《판량비론()》 《대승육정참회()》 《발심수행장()》 《유심안락도()》 《십문화쟁론()》 등이 있다.

[출처] 원효 [元曉 ]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