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

한국인이 소재가 된 루벤스와 피카소 그림

이천이 2010. 9. 23. 12:47

 
루벤스 <한국인>

1617년경에 그린 이 그림은 비록 드로잉이었으나 갓과
한복(철릭)을  갖춰 입은 양반의 모습이다. 이 그림의 모델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유럽 땅을 밟은 안토니오 꼬레아
(Antonio Korea)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로서 이 사람이 어떻게
유럽으로 갔으며 Antonio Korea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는
역사추적을 해본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일본 측 주장(主將)의 한 사람이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당시로는 드물게 천주교 신자로
한반도에 상륙했을 때 종군신부로 마드리드 태생의
세스페데스(Gregori de Cespedes) 신부를 대동하였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신부가 만난 한국인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끌려갈 운명에 처한 조선인 포로들이었고 신부는 이들을 상대로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유키나카의 정적(政敵)이었던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은
일본으로 압송한 한국인 포로들을 노예시장에 마구 내다 팔았다.
1597년 6월 일본을 찾았던 이탈리아의 신부
카르레티(Francesco Carletti)가 나가사키 노예시장에서
마카오나 인도차이나로 팔려갈 운명의 조선인 소년포로 5명을
구해서 인도의 고어까지 데리고 갔고, 그 중 한 소년을 피렌체로
데려가 교육을 시킨 뒤 안토니오 꼬레아 라고 이름 지어
로마에 살게 하였다.


루벤스의 <성 프란시스 사비에로의 기적>의 밑 그림 

한국인’을 소장하고 있는 미국 게티 미술관 큐레이터
리 헨드릭스 박사는 10일 “현재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루벤스의 ‘성 프란시스…’(가로395㎝·세로 535㎝·1617~1618)에 보면 드로잉 ‘한국인’과 유사한 얼굴과 복장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드로잉 ‘한국인’을 발전시켜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헨드릭스 박사는 미국 미술사학자 조지 골드너씨의 1987년 저서를
인용 “1617년 4월 이전에 그려진 최초의 유화 밑그림과 1618년
그려진 최종 밑그림을 비교해 보면 문제의 인물이 좀 다르게 그려져
있다”며 “아마 루벤스가 최초 밑그림을 그린 뒤 ‘한국인’을 만나
드로잉을 하게 됐고, 이 드로잉을 발전시켜 ‘성 프란시스…’에도
등장시킨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사람이 바로 최초로 유럽 땅을 밟을 한국인이며, 이 드로잉은
루벤스의 <성 프란시스 사비에로의 기적> 유화 그림속의
배경인물을 위한 밑그림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국인’은 1983년 11월 29일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드로잉 경매 사상 최고가인 32만4000파운드(약 6억6000만원)에
팔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금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게티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가로 23.5cm, 세로 38.4cm의 그림 속 주인공은 조선 시대 무관이
입던 공복(公服) 철릭 차림으로 검정 분필로 윤곽을 그린 뒤
콧잔등 뺨 귀 등에 부분적으로 붉은 색 터치를 해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실크 옷에 은은하게 퍼지는 빛의 효과에 매료된 루벤스는
검정 분필의 부드러움과 종이의 순백을 이용해 희미하게 반짝이는
주인공의 의상을 표현했다





헨드릭스 박사는 “드로잉에는 루벤스가 생전 처음 만난 동양인에
매혹돼 정신없이 그렸던 감흥이 그대로 살아있다”고 말했다.
“머리는 작게, 몸집은 좀 크게 그렸는데 이는 루벤스가 특히
복장에 매료됐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아래까지 선이 소용돌이치듯
내려오며 옷감의 반짝임까지 살렸습니다.”
그는 한국 내에는 루벤스의 ‘한국인’이 전혀 동양인 같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는 말에 대해 “서양인이 보기엔 분명한 동양인이며
그 표정은 너무나 경이롭게 묘사돼 있다”고 말했다.
2003. 12. 10. 조선일보




피카소의 <한국의 학살>

피카소의 걸작품 가운데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작품이 <게르니카(Guernica)>(1937)(아래 그림 )이다.



사실주의적 내지 인상주의적 평면회화를 해체시키고 20세기의
새로운 입체화를 창시한 피카소는 한편 사회의식이 돋보인 까닭에
많은 사람의 찬사를 받았다. 따라서 스페인의 프랑코 우파의
만행을 고발한 게르니카는 그의 올곧은 사회의식이 담겨져 있는
명작으로 칭송을 받았다.


한국 전쟁 중에 그가 그린 <한국의 학살>(1951)은 북한 주민을
학살하는 미군들의 만행을 규탄하는 그림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도 이용당했다.
피카소는  나치 치하에서 가장 치열하게 저항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감동되어 자신도 후에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니 이 그림을
반미 운동에 이용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세계의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돌려놓는데 훌륭한 자료로 이용되었다.


고야 <1808년 5월 3일>

이 작품 <한국의 학살>은 고야가 나폴레옹군의 스페인 학살을
그린 작품 <1808년 5월 3일>(1814-1815)(그림 4.)을 패러디한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영동-달빛자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