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엔 과거와 함께 문화의 미래가 있다 / 김종규 [펌]
박물관엔 과거와 함께 문화의 미래가 있다 / 김종규 - 2013.06.28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前 삼성출판사 회장) 이사장은 …
1939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목포상고를 나와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가업인 삼성출판사에서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고
1990년부터는 삼성출판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다.
1999년 한국박물관협회 회장직을 맡아 8년 간 활동했으며,
지금은 명예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통령 표창, 국민훈장 목단장, 일맥문화대상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자랑스런 박물관인상 등을 수상했다.
가업 서점서 다양한 책 보며
‘출판사’ 꿈꾸고 ‘문화’ 생각 키워
삼성출판박물관 개관
‘문화계 대부’‘박물관’ 그의 별칭
“우리문화재 70% 이상 불교”
불자들의 문화재 보존은 당연
“문화란 인류만이 누릴 수 있는 ‘가치’들을 말하는 것이며,
문화유산이란 그 가치들의 결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발전시켜온 선학의 지난날과 앞으로의 기대를 생각하는 것이
저의 일이었고, 또 앞으로의 일입니다.”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74).
서울 정동의 중명전(그의 집무실)에서 만난 그는
‘문화계 대부’로 불리는 자신과 자신이 결집해 온 ‘문화’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다.
중명전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던 곳으로 역사적인 공간이다.
그는 늘 문화유산 속에서 살고 있었다.
‘문화계 대부’로 불리는 그런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과 지금 하는 일은 무엇이고,
그런 그의 인생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6월 26일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서점집 아들의 꿈
그는 서점집 아들이었다.
전남 목포의 작은 동네에 자리한 대양서점.
살림집에 딸린 서점이었다.
그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책 속에서 살았다.
다양한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이름 뒤를 따라다니는 ‘문화’는 작은 서점 한 쪽에서 움튼 것이다.
다양한 책 속에서 접한 새로운 ‘세계’가 그를
‘문화를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했다.
어느 날,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훗날 최고 작가 반열에 오르는 윤청광을 만나게 된다.
당시는 모두 사는 게 어려웠다.
역시 고등학생이었던 윤청광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살 형편은 되지 못했고 책은 읽고 싶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숨어서 책을 읽고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 아들은 숨어서 책을 읽고 있는 그 친구를 불렀다.
그리고 미안해하는 그 친구에게 보던 책을 포장해주며 가져가서 읽으라고 말한다.
그때부터 문학청년 윤청광은 서점 아들의 배려로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두 살 정도 어렸던 윤청광과 형제처럼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 한다.
“너는 문학을 좋아하니 훗날 최고의 작가가 되어라.
나는 책을 파는 집에 태어났으니 우리나라 최고의 출판사를 만들겠다.”
그의 꿈은 ‘출판사 대표’였다.
그리고 그 꿈은 ‘문화계의 대부’로 가는 첫걸음이 된다.
그는 결국 출판사의 대표가 된다.
삼성출판사.
형님이 세운 출판사다.
그는 부산 지사장을 거쳐 대표이사에 올랐다.
그리고 회장직을 역임하며 30년 넘게 출판사를 이끌었다.
수집가를 수집한 ‘수집가’
1990년 그는 삼성출판박물관을 연다.
출판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에는
국보 265호 〈초조대방광불화엄경〉과
보물 758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보물 745호 〈월인석보〉,
보물 877호 〈금강반야바라밀경〉 등
고려 불경과 금속활자 인쇄 전적 등 40여 만점이 전시되어 있다.
출판사의 꿈을 이룬 그는 청년기에 서점에서 꿈꾸던 ‘문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진정한 문화의 원천은 무엇일까.
“기업과 개인이 평생 수집한 문화재와 미술품을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만들어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의 원천입니다.
여기에 미래지향적 문화의 탄생을 기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박물관을 세우기로 했고, 탄생한 것이 삼성출판박물관이다.
그는 70년대부터 민중박물관협회를 만들며 박물관을 준비했다.
당시 그의 행보를 알아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소장자가 그를 찾아와
〈증도가〉의 진정한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며 그에게 〈증도가〉를 맡긴다.
〈증도가〉는 당초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을
고려 고종 26년(1239)에 목판으로 복원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ㆍ1377년 인쇄〉보다
최소 142년 전부터 금속활자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다.
그렇게 소중한 문화재를 간직하게 된 그는 박물관 건립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다지게 되고 삼성출판박물관을 열게 된 것이다.
출판사에서 박물관으로
박물관으로 영역을 넓힌 후 그의 문화적 유전자도 확장되기 시작한다.
자신의 박물관을 열고 난 그의 문화적 욕구와 관심은
한국 박물관 전체로 확장된다.
훗날 그의 이름을 따라 다니게 되는 말 중의 하나가 ‘박물관’일 만큼 ‘박물관’은
그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된다.
우선,
그는 유물을 발굴하고 소장하고 있는 수집가들을 찾아 나선다.
그는 수집가들을 수집한 것이다.
그것이 그의 ‘수집’의 반경을 넓힌다.
그는 진정한 ‘수집가’였고,
그것이 훗날 그의 이름 뒤에 ‘박물관’이란 부제를 달게 한다.
그는 한국 박물관 100년사 가운데 3분의 1을 차지하는 시간 동안
오로지 박물관을 위해 뛰어 다닌다.
자신의 박물관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박물관을 자신의 박물관으로 생각한 것이다.
문화재를 찾아다니고,
수집가를 찾아다니며 박물관을 전시장을 채우는 일 뿐만 아니라
전국의 국공립, 사립, 대학박물관에서 열리는 수많은 전시회를 찾아가
일일이 축사를 전하고,
각종 전시, 출판, 학술 관련 행사 등 초청받은 행사에는 빠지지 않았다.
그 안에 불교가 있었다
그렇게 ‘박물관’은 그의 삶을 이끄는 커다란 축이 되었다.
그리고 그 큰 축 속에는 또 하나의 큰 축이 있었다.
‘불교’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절에 다녔다.
그에게 불교는 매일 받는 밥상과 같았고, 의복과 같았다.
자연스러운 가정의 문화였던 것이다.
그는 동국대에 입학했다.
그는 백성욱 박사로부터 〈금강경〉을 들으며 막연히 대해왔던 불교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인식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확장된 그의 문화적 영역 속에는 ‘불교문화재’,
성보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게 된다.
그 후 그의 또 하나의 시선은 성보박물관으로 향한다.
1999년 통도사성보박물관 개관을 시작으로
현재 운영되고 있는 20여 곳의 성보박물관의 탄생에 크고 작은 역할을 한다.
“천년고찰 자체가 박물관이긴 하지만
사찰 내 박물관이 건립된다는 것은 그만큼 성보에 대한 보존관리 인식이
불교계에 높아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는 성보박물관 개관법회는 물론
특별전이 열리는 자리는 원근을 가리지 않고 찾았다.
본인의 말처럼 선학의 지난날과 문화의 미래가 걸려 있는 박물관은
그가 살펴야 할 부모이고 자식이었다.
“성보박물관 개관은 단순한 현상일 수 있지만,
사찰에서 불교문화재를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여건이 됐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확장된 불교관이 꽃을 피운 것이다.
‘확장’의 회향
“우리 문화재의 70% 이상이 불교문화재입니다.
우리의 문화재를 이야기 할 때 불교문화재를 빼면 이야기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 소중한 불교문화재 가운데 국가나 지자체에 등록,
지정된 문화재는 많지 않습니다.
인식표를 달지 못한 문화재에 대한 보존과 계승은
우리 세대가 실천에 옮겨야 할 숙제입니다.”
2010년 4월 그는 문화유산국민신탁 2대 이사장에 취임한다.
그는 국민과 불자들에게 문화유산국민신탁에 적극 참여해 줄 것을 당부한다.
2007년 설립된 문화유산국민신탁은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운동의 한국판으로,
국민(개인, 기업, 단체)의 기부, 증여 등을 통해
위탁받은 재산, 회비 등을 활용하여 보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등을 취득하고,
이를 민간 차원의 자발적인 참여 방식으로 영구히 보전, 관리하는 특수법인이다.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이야말로
그 동안의 ‘확장’을 집약적이고 총체적으로 회향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에 가면 괴테 하우스는 반드시 찾는 명소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소설가 현진건의 집이 개발에 밀려 헐리는 상황이 재현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찾아 국민의 힘으로 지켜내야 합니다.”
그는 오늘도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그렇게 촘촘하게 이어지는 인연을 통해
문화유산국민신탁의 회원 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아직은 ‘문화유산국민신탁’에 대해 국민들이 잘 모릅니다.
법인의 존재를 알리고 취지를 홍보하는 것이 첫 번째 저의 임무입니다.”
그는 기자의 이름도 회원명부에 올리겠다며 명함 한 장을 더 달라고 했다.
그는 2010년 그가 이사장에 취임했을 당시 300명이었던 회원 수를
현재 4000명으로 늘려놓았다.
“미래 후손들에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물려주기 위해선
문화유산국민신탁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보존하는 데 앞장서온 불교계와 불자들이
적극 나서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문화의 ‘미래’
“방글방글 부처님 세 분이 마치 합창이나 하듯이 함께 웃고 계신다.
서산 산중턱에 동향을 하고 서 있는데
아침에 해가 뜰 때는 더 볼이 터져 나갈듯한 함박웃음을 짓는다.
보는 각도와 조명에 따라서 조금씩 미소의 차이는 있어도
하루 종일 웃고 지금까지 1400년을 그 자리에 서서 변치 않는 미소로
우리들을 맞이하고 있다.”
올 2월,
그는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충남 서산의 마애삼존불상을 찾는다.
그날 일간지에 실린 칼럼(이배용의 우리 역사 속의 미소)을 읽고 나서다.
몇 번 쯤 가보았지만 칼럼을 읽는 순간 그는 1400년의 미소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7세기 초 백제시대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절이면 백제가 기울어져 가던 때였다.
한성에서 공주로,
다시 부여로 밀려오면서도 재기의 희망을 잃지 말라는 평화의 미소,
백제의 미소다.
두꺼운 화강암을 조각해 아름다운 미소의 부처님을 세운 이름 모를 석공의
마음이 좌절하고 분노했더라면 이렇게 오늘날에도 다가서면
마음의 영원한 안식을 주는 따뜻한 미소를 전할 수가 없다.
바로 서해안으로 가는 길목 산중턱에 서서 서해안을 건너가려는 길손에게는
잘 다녀오라는 평안의 미소로,
서해안을 건너온 손님에게는 잘 왔다는 환영의 미소로 화답하는
마음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마애불 앞에 선 그는 칼럼 속의 문장들을 떠올리며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신비의 미소에 또 한 번 매료됐다.
역사가 남긴 박물관 앞에서 그는 지금까지의 신념에 다시 한 번 신념을 더했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담고 있는 박물관은 우리 문화의 ‘미래’라는 것을.
출처 :현문 수다원 원문보기▶ 글쓴이 : 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