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저녁 서울 종로구 광화문 근처의 한 식당에서 재경(在京) 포항향우회 간부 모임이 열렸다. 다음 달 9일 열릴 경북도민체육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포항시 읍면동 향우회의 사무국장과 부장급 20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체육대회에 대한 논의가 끝나자 이 자리는 '영포라인' 실세들에 대한 성토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참석자들은 최근 비리 혐의로 구속된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물론 이상득 새누리당 의원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왼쪽부터 이명박 대통령, 박영준 전 차관, 이상득 의원,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이영호 전 청와대 비서관 / 일러스트=오어진 기자 polpm@chosun.com

한 참석자는 "모임에 나와도 얼굴만 내밀고 밥 한 끼 제대로 사지 않았으면서 뒤로는 업체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고, 또 다른 참석자는 "일부 실세와 그들의 추종자들이 고향 후배들의 앞길을 망쳐 놓았다"고 했다. 박 전 차관에 대해선 "대통령과 이 의원 등이 지나치게 끼고 돌면서 나라를 휘젓게 만들었고 그의 고향(경북 칠곡)이 다른데도 포항 이미지에 먹칠을 더했다"는 말이 나왔으며, 민간인 사찰 사건으로 구속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에 대해선 "능력이 되지 않은 사람을 중용한 실패한 인사(人事)"라는 언급이 있었다.
다만 최 전 위원장과 이 전 비서관의 고향 마을인 구룡포 향우회에서 온 간부는 별다른 언급 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인근 맥줏집으로 이어진 이들의 2차 자리에서도 수사를 받고 있는 정치인에 대한 '동정론'은 없었고 오히려 "검찰이 제대로 해야 한다"는 반응까지 있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임기 마치기도 전에 쓴소리
"포항 출신도 아닌 박영준
대통령이 너무 끼고돌아
포항 이미지에 먹칠"
정권창출 열매, 소수가 독식
"생업 접고 대선 도왔는데
자질·경력 모자라는
심복들한테만 자리 돌아가"
줄 없는 기업들은 피해봐
이상득과 친분 이동조 등
도시락·철조각 사업 특혜
"포항출신 내부고발 가능성"
한때 대통령 배출을 자랑스러워 했던 포항 사람들이 왜 임기를 마치기도 전에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쏟아낸 것일까. 그날 향우회 모임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현 정권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잘못되는 등 인사 실패를 우선 지적했다. 이상득 의원과 박 전 차관을 비롯한 소수 인사가 권력을 독점하는 바람에 대선에 기여했으면서도 배려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현 정부 초기 박 전 차관과 이 의원의 권력 사유화를 비판했던 정두언·이재오 의원의 시각이나 포항 사람들의 시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캠프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선거 캠프에서 일 열심히 했다고 좋은 자리 간 것도 아니었고 단지 고향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성공한 사람도 거의 없다"며 "정권 창출의 열매는 영포라인 실세와 그들을 맹목적으로 따랐던 인사들이 독차지했다"고 말했다.
최근 포항 출신 사이에 벌어진 인사 갈등도 대통령 측근들에 대한 민심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2007년 대선 캠프에서 몸담았던 L씨는 당시 이상득 의원의 요청으로 경호 회사를 만들어 대통령 후보를 도왔다고 한다. '무보수 '로 근무하면서 4억원의 빚까지 진 그가 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에서 제시받은 자리는 민간단체의 감사였다. 10여년 전 이미 고위 공무원(1급)을 지냈던 L씨는 내심 서운했지만 '청와대가 챙길 사람이 한두명이 아닐 것'이라고 보고 그 자리에 만족했다고 한다. 물론 대선 때 그가 사용했던 돈은 지금까지 '보전'받지 못했다. 지난해 연임에 성공한 그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내년 초 물러날 계획이었으나, 최근 청와대로부터 중도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 중인 K씨가 L씨의 자리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K씨는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셔온데다 이상득 의원 등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현 정부에서 '벼락출세'한 인사로 알려져 있다. L씨의 지인은 "K씨는 현 정부에서 누릴 위세를 다 누렸다. 대통령의 '순장조'로 남거나 조용히 물러날 생각은 하지 않고, 선배의 자리를 탐낼 게 뭐가 있느냐"면서 "L씨가 고위 공무원 시절 K씨의 인사를 챙겨줬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대선 캠프에서 일했던 포항 출신의 K씨도 실세들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정치인들로부터 청와대나 공기업에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는 말만 들었을 뿐 지난 4년 내내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는 "생업을 포기하고 대통령 당선을 위해 뛴 사람 중에 나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면서 "정권 창출에 기여하지 않고도 실세와의 특수관계를 이용해 잘 나가는 인사들을 봤을 때 울화가 치민다"고 했다. 포항 출신의 한 대학교수도 "비단 포항 출신뿐 아니라 능력 있는 공무원들이 전국 도처에 많은데도 인사권자는 자질과 경력이 모자라는 일부 동향 출신 '심복'에게 중책을 맡기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런 현상이 계속됐다"고 지적했다.
포항 현지에서도 권력 실세와 일부 기업인에 대한 감정은 악화되고 있었다. 최근 중국으로 도피한 이동조 제이엔테크 회장은 박영준 전 차관이나 이상득 의원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현 정권에서 승승장구했지만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 기업인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가령 이 회장이 포스코에 납품했던 조은도시락의 매출 규모는 크게 늘어난 반면 경쟁관계에 있는 효자도시락 등 다른 업체는 불이익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에서 나오는 철조각(스크랩)을 중개하면 큰 수익이 보장되지만 공급되는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회장 등이 차지하는 몫만큼 다른 기업인이 가져가는 몫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포스코 협력업체 관계자는 "기술력으로 납품업체를 결정한다면 수긍할 수 있으나, 정치권 로비를 통해 납품 여부가 결정된다면 그런 정치인과 기업인에 대해 좋은 평가가 나오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포항 지역에선 영포라인 정치인에 대한 추가 비리는 야당이나 검찰이 아니라 포항 출신들의 내부 고발로 인해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나온다. 이인규 전 국무총리실 윤리지원관 등 민간인 사찰 사건으로 수사를 받고 있는 포항 출신 공직자들은 오래전부터 정치권 인사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정치권 입김으로 포스코 납품이 중단된 중소업체나 4대강 공사에서 탈락한 일부 지역 업체도 영포라인의 '피해자'로 분류될 수 있다. 재경 포항향우회 관계자는 "지금은 포항 출신이라고 모두가 욕을 먹고 있지만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과 역차별로 이중 피해를 본 지역 출신들이 훨씬 더 많다"며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이들이 영포라인 실세를 바라보는 눈길이 더욱 차갑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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