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

신미(信眉)대사와 한글

이천이 2011. 9. 29. 16:16

 

*禪敎宗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

*해석 ; 선교종도총섭-선과 교학을 병진하여 수행토록 다스리다.

           밀전정법-부다의 참된 가르침의 본질을 모든 사람들 정신의 양식이 되도록하다.

           비지쌍운-지혜와 자비를 성취하는데 최선을 다하다.

           우국이세-훈민정음 창제를 통해서 모든 백성이 쉽게 글자를 익히게 되어 나라와

                            백성에게 유익하며, 정치의 요결이 되다.

           원융무애-순결한 마음으로 임무에 최선을 다하여 만사를 원만 무애하게 이루다.

           혜각존자-부다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한 성자.

*26자로 된 긴 시호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창제의 주역을 한 신미대사의 공로에  보답

한 시호로 대왕의 와병으로 문종에게 유언하고 승하함에 문종이 즉위 원년에 신미가 병환중

이라 금란지에 관교를 써서 자조폭으로 싸서 사람을 보내어 하사하였다.

 

*신미(信眉)대사와 한글 (200810.16 옥)


속리산 복천암에 전해져 오는 ‘신미대사(1403~1480) 한글 창제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신미(信眉)는 속성(俗姓)이 영산김씨(永山金氏)인데, 영산김씨 족보를 추적해보면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득총어세종(得寵於世宗)’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집현전학사’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집안 내에서는 신미가 집현전학사였다고 내려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집현전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없다. 불교 승려는 무대 뒤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대였던 것이다.


세종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신미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 하지만 유생들의 줄기찬 반대로 인해서 ‘우국이세’(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라는 표현은 삭제되고, ‘혜각존자’라는 단어만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신미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범어(梵語)와 티베트어로 된 불교경전에 정통했던 대학자였으므로 혜각존자라 할 만하다. 이러한 인물이니까 세종 사후에도 세조(世祖)가 불교승려인 신미를 만나러 속리산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한글이 창제(1443)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에 집현전 실무 담당자인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 반대 배경에는 훈민정음의 원리적 근거가 유교가 아닌 불교였기 때문이고, 그 불교의 한가운데에 신미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공교롭게도 한글 창제 무렵에 간행된 국가적인 번역사업이 불교경전이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24권 분량의 ‘석보상절(釋譜詳節)’이 그렇고,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도 그렇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찬불가(讚佛歌) 아닌가. 쉬운 한글을 만들었으면 ‘논어(論語)’‘맹자(孟子)’와 같은 유교경전들을 번역해서 백성들이 읽게 해야지, 왜 하필이면 불경을 번역했단 말인가.


‘월인석보’는 세종의 어지(御旨)가 108자이고, ‘훈민정음’은 28자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에서 아침 저녁으로 종을 칠 때 그 횟수는 28번과 33번이다. 하늘의 28수(宿)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신미 창제설’의 결정적인 근거는 신미가 당대 최고의 범어전문가였고, 한글이 범어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이다.


 

아침안개 (2006-10-12 16:03:19)  

 

범어라면 산스크리트어인데 어디서 산스크리트의 문자가 한글에서 비롯되었다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한글이라면 녹두문자 때 말입니다. 한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문자의 원리가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글이 가장 그 원리에 충실하다고 하고요. '근데 인류학적 근거는 없으니 그냥 무시하세요.' =_= 

 

정훈 (2006-10-16 00:09:26)  

 

아침안개님

범어라면 산스크리트어인데 이 문제? 한번 티비에 보도된바 있습니다. 인도 북방지역의 어느 소수족인데 퍼란카드에 놀랍도록 꼭 한글인 글자로 글씨가 쓰여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글자 작법뿐만 아니라 형체도 상당히 같은 것을 도입 하여 모방한 글자가 돼 버리는데 이 문제는 반드시 확인절차를 한번 거쳐야 할 줄 압니다. 

 

  

*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 ▣ 뉴스게시판 

2008/10/09 08:07


 http://blog.naver.com/since4299/110036041542

이 포스트를 보낸곳 ()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 한글 창제에 숨겨진 비밀 (하) 2008년 10월 09일(목) 이야기과학실록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설을 뒷받침하는 세 번째 근거는 그가 문종으로부터 받은 법호이다. 문종은 즉위한 지 2개월도 안 돼 신미대사에 대한 제수(除授)를 거론했다. 선왕인 세종대왕께서 제수하고자 했으나 신미대사의 질병으로 미뤄졌으니 지금 제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


그러나 졸곡(卒哭 ; 사망한 지 3개월 후에 지내는 제사)을 지낸 후에 제수해도 늦지 않다는 신하들의 만류에 따라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450년 7월 6일 문종은 신미대사에게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의 26자에 이르는 긴 법호를 내렸다.

 

▲ 신미대사가 주로 머물렀던 속리산의 복천암  

존자(尊者)는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였는데, ‘개국 이후 이런 승직이 없었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실록은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법호 중 ‘우국이세(祐國利世)’라는 말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국이세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다. 억불숭유 정책을 취한 조선에서 신미대사의 법호에 그런 말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세종대왕이 내세운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문종이 우국이세를 굳이 법호에 포함시킨 것은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신미대사에게 법호가 내려진 후 잇따른 신하들의 상소와 그에 대한 문종의 반응 또한 흥미롭다. 하위지ㆍ홍일동ㆍ신숙주ㆍ이승손 등은 신미의 칭호가 부당하다며 적극 반대했고, 집현전 직제학이던 박팽년은 강경한 태도를 보이다 불경한 문구를 사용하여 파직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이에 대한 신하들의 직언이 끊이질 않자 문종은 결국 20일 만에 신미의 칭호를 ‘대조계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승양조도 체용일여 비지쌍운 도생이물 원융무애 혜각종사’로 고쳤다.


존자에서 종사(宗師)로 바꾸고, ‘우국이세’란 말은 아예 빼버린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 ‘중생을 제도하고 일을 잘 되게 한다’는 뜻의 ‘도생이물(度生利物)’이란 문구를 넣었다.


이밖에도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많다. 신미대사의 가문인 영산 김씨 족보를 보면 ‘수성이집현원학사득총어세종(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이란 문구가 나온다.



▲ 복천암의 동쪽에 건립되어 있는 신미대사의 수암화상부도. 보물 제1416호.  

여기서 수성은 신미대사의 속명인데, 풀이하자면 신미대사는 집현원 학사를 지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신미대사는 세종대왕에게서 많은 총애를 받았다. 신미대사가 있던 속리산 복천암에 세종은 불상을 조성해주고 시주를 했다. 또 승하하기 불과 20일 전에 세종은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서 법사를 베풀게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대우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을 번역, 간행했을 때 신미대사는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그밖에도 많은 불교 서적을 한글로 직접 번역했다. 따라서 신미대사라는 인물이 만약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의 한글 문헌이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그럼 왜 세종은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 참여를 단 한 번도 밝히지 않았을까. 또 실록이나 그 당시 전하는 어떤 기록에도 신미대사와의 한글 창제 관련 문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한글 창제를 반대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거기다 승려가 관여했다고 발표하면 유생들의 반발이 더욱 거셌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때문에 세종은 유학자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그들이 신미대사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 차원에서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 관여를 비밀에 부쳤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한글을 창제한 후 이론적 체계 확립과 훈민정음의 보급 사업을 슬쩍 집현전에 맡겼는데, 이 역시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실제로 그 당시 조선왕조실록에서 신미대사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실록에서 신미대사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6년(세종 28년) 5월 27일이다. 그에 의하면 세종은 “우리 화상(신미대사를 지칭함)은 비록 묘당(의정부)에 처하더라도 무슨 부족한 점이 있는가”라며 그를 칭찬하고 있다.


그런데 신미대사의 호칭 앞에는 ‘간승(奸僧)’ 내지 ‘요망한 중’이라는 글귀가 항상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신미대사의 친동생인 김수온이 벼슬을 제수 받을 때도 형인 신미대사가 요사한 말로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라는 투로 기록하고 있다.


 

▲ 훈민정음 반포 장면을 그린 그림  

이처럼 승려(혹은 신미대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분위기에서 그의 운신 폭은 그리 넓지 않았을 것이다. 신미대사가 직접 번역한 불교 경전의 초판본에는 법호가 명시돼 있지만 재판본에는 빠져 있는 걸로 볼 때, 세종 사후에 유생들이 조직적으로 신미대사와 관련된 문구를 모두 삭제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 참여설은 아직까지 학계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우선, 승려의 참여 증거로 꼽히는 범자모방설의 경우 한글의 수많은 문자 모방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산스크리트 문자인 범자 외에도 티베트 문자 모방설, 일본의 신대문자 모방설, 단군 조선의 가림토문자 기원설 등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또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가 점령국들의 언어를 통일하여 표기할 수 있게 만든 파스파 문자가 고려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와 훈민정음의 창제에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정초가 지은 ‘육서략’에서 논리적으로 문자를 만드는 과정이 서술된 부분을 참고하면 한글의 기본 자음자를 모두 만들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는 ‘발음기관 상형설’과 모음은 천지인(天地人)의 모양을 본뜨고 자음은 음양오행설을 이용해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훈민정음 창제 후 불교 서적의 간행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말년에 불교로 귀의한 세종의 행적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 전인 1444년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을 잃고 이듬해에는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을,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부인인 소헌왕후를 차례로 잃었다.


 

▲ 한글의 타 문자 모방설은 여러 가지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그로 인한 슬픔을 이기는 과정에서 불당의 법회를 베푸는 등 자연스레 불교에 빠져들었고, 한글 창제 후 불경의 간행을 우선적으로 진행했을 수 있다. 또한 세종의 아들인 세조도 호불왕(好佛王)으로 불릴 만큼 과감하게 불교중흥정책을 펼쳤다.


한글로 된 불교 서적의 간행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이런 왕실의 분위기와 한글을 업신여기는 유학자들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였다는 영산 김씨의 족보 역시 정식 사료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한 가문의 족보라는 점이 문제다. 족보에는 언제나 과장되거나 아전인수식의 표현이 많이 등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할 때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현재로서는 가장 믿을 만한 정보다. 한글의 창제 원리가 이론적으로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목요연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출처]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작성자 무주공산


*한글기원과 신미대사

성현-이수광-이능화의 梵字 기원설과 부합

<사진설명>훈민정음 보급의 일등공신 신미 대사는 범자(梵字)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했다.(좌) 그러나 유학자들의 질시로 그가 번역한 경전마저 나중에는 삭제되는 비운을 맞는다. 초판본(中). 초판본에 들어있던 신미 대사 법호가 재판본에는 빠져있다.


지난 2001년 12월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발표한 “훈민정음 각필부호 유래설”은 신미대사가 한글창제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각필’은 고대 문헌에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한자 옆에 점과 선, 또는 글자를 새겨 넣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는 양식으로 이 교수가 고려시대의 불교경전을 조사해본 결과 각필 중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과 무려 17개가 일치하고, 자음과 모음의 체계까지도 대단히 유사함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러한 학설은 세종대왕이 수양대군 등 아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불교경전에 정통한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토록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사료를 통해 밝히고 있듯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대왕이 한글이 창제되기 4년 전부터는 정사를 돌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고, 이로 인해 가장 중요한 일과의 하나인 경연(經筵)조차 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신미대사는 당시의 대표적인 학승으로 범어를 비롯한 인도어와 티베트에도 정통했으며, 불교경전에도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신미대사가 세조 2년(1456) 범어계통의 인도 문자와 티베트어로 쓴 친필 진언과 부적류들을 분석한 허일범 진각대 교수는 “상당히 많은 분량임에도 오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한글창제와 관련해 수백년 동안 ‘범자(梵字) 기원설’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조선전기 학자인 성현(1439~1504)은 “훈민정음은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으며, 이수광(1563~1628)도 “우리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 모양을 본떴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언어학자인 황윤석(1729~1791)은 “우리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범자에서 근본하였으며 범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이능화(186 9~1943)도 한글글자법이 범자에 근원한 것이라며 비슷한 용례까지 들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미국인 학자 헐버트(1863~1949) 등 외국인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도에서 범어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봉태 목사도 지난 2000년 말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을 통해 한글의 기원이 범어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학설들 또한 여전히 많은 연구와 검증의 절차를 남겨 놓고 있음에도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적극 참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범자기원설은 한글창제 당사자들이 불교경전 및 그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고 있었음을 의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자연스럽게 당시 왕과의 교분이 깊고 언해본 간행을 비롯해 경전언어에 깊은 조예가 있는 신미대사를 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실록에서는 왜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일까. 동국대 황인규 박사는 “당시 억불숭유의 정치적 상황에서 승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더욱 거셌을 것”이라며 “이는 세종대왕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자 대의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교의 이데올로기만을 숭상했던 조선시대가 초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난 94년 작고한 이숭녕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미대사만치 유명한 고승이 후세에 남긴 법어나 시, 글 한편 없이 너무나 적막한 생애를 스스로 걸어갔다”며 “학덕이 높고 국어학사상 특기할 인물이었지만 사회의 냉랭함에서 쓸쓸히 입적한 가여운 인재”라고 애석해했다.


지난 550여 년간 이념의 벽으로 인해 스스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고승 혜각존자 신미스님. 이제 그의 위상과 업적을 올곧게 복원하고 선양해야 하는 것은 이제 후학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2004-09-29/773호>

입력일 : 2004-10-04 08:31

한글어지 108자 … 월인석보도 108쪽


한글창제와 숫자의 비밀

어느 종교건 특정 숫자를 신성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불교는 유독 그런 성향이 강하다. 심지어 0에서 무한대에 이르기까지 숫자를 불교적으로 해석한 『대명법수』라는 책이 나올 정도다. 이런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표면적인 목적 외에도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은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대 국문과 김광해 교수의 ‘훈민정음과 108’론이 바로 그것이다.


김 교수는 그동안 『한글창제와 불교신앙』(불교문화연구 제3집) 등 일련의 논문을 통해 창제 과정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불교의 대표적인 신성수 ‘108’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의 의도적인 조절임을 주장했다.


김 교수가 먼저 주목한 것은 ‘나랏말싸미듕귁에달아…’로 시작하는 한글 어지(御旨)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되는 한문 어지다. 한글은 모두 108자고 한문 어지는 108의 꼭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 교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더부러’ 등을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등 적어도 4글자 이상이 탈락됐다는 것이다. 또 한문 어지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而己矣’를 사용하지 않고 ‘耳’를 사용하고 있는 등 글자의 수를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담겨 있음도 함께 지적했다.


훈민정음 창제과정에 나타나는 숫자의 비밀은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 교수는 108글자의 세종 어지가 실린 『월인석보』 제1권의 장수(張數)도 108쪽임도 밝히고 있다. 특히 다른 권들과는 달리 일련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 별도의 권으로 만들면서까지 쪽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 또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의 경우 불교적인 우주관을 상징이라도 하듯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이들 경우 외에 다양한 사례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훈민정음의 창제 당사자들이 이렇듯 일련의 주도면밀한 노력을 은밀히 기울인 것은 불교 보급의 목적이 담겨 있다”며 “그러한 종교적 염원이 숫자를 조절하는 은밀한 방법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맺고 있다.

실제 세종에서 연산군 때까지 발간된 훈민정음 문헌의 65%이상이 불교관련 문헌이며, 유교 문헌은 단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

입력일 : 2004-10-05 12:12


“왜곡된 한글창제 역사 바로잡아야”


30년간 신미 대사 자료 수집 복천암 주지 월 성 스님

 “한글 창제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신미 대사가 역사 평가에서 가려져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선 초 뛰어난 학승 신미 대사의 비밀을 밝혀냄으로써 한글 창제와 관련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것입니다.”


지난 30년 간 신미 대사의 자료 수집에 전념해온 속리산 복천암 주지 월성 스님은 “신미 대사는 한글창제의 결정적 영향력을 끼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학자들의 그릇된 사관으로 한글창제의 배경과 과정이 왜곡돼 있다”며 “신미 대사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75년 사형인 탄성 스님의 권유로 복천암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월성 스님은 이 때부터 신미 대사에 관한 자료 수집에 천착했다. 신미 대사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발굴 정리하는가 하면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한 것도 수십 차례. 스님은 신미 대사의 기록을 복원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신미 대사의 기록을 복원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님이 신미 대사에 관한 자료 수집이 계속될수록 풀리지 않은 숙제가 남아 있었다. 당시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던 조선 초기에 어떻게 신미 스님이 집현전에 들어갔으며 한글 창제에 참여할 수 있었는가가 그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복천암을 찾은 영산 김씨의 한 후손으로부터 신미 대사와 관련된 족보와 대사의 친동생 김수온이 썼다는 『복천보장』을 전달받고 스님은 이 같은 의문을 하나씩 풀어갔다.


“신미 대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 스님이 어떤 인물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산 김 씨의 족보에 신미 대사는 태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귀족가문 출신이며 범자에 능통한 분이었다는 기록을 보고 신미 대사에 가졌던 의문을 하나씩 밝혀나갔습니다.”


스님은 『복천보장』과 영산 김 씨의 족보를 통해 신미 대사는 한학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범서 장경에도 능통한 학승으로 집현전에 초빙돼 한글 창제에 임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스님은 또 한글의 모음과 자음이 범어 글자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은 당시 범어에 가장 능통했던 신미 대사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특히 스님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이후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능엄경』, 『원각경』등 총 28종의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불교에 대한 깊은 식견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한글 창제의 배경에 신미 대사가 제외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또 이 같은 한글 창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신미 대사가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당시 숭유억불이라는 강력한 통치이념을 추진했던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스님은 “실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신미 대사에게 ‘선교도총섭밀전정법지비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라는 내리자 수많은 유생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는 이후 문종 대까지 계속된다”며 “이런 이유로 한글창제를 주도했던 신미 대사가 역사적으로 가려지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제는 신미 대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때”라며 “왜곡된 신미 대사에 대한 기록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한글 창제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은=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2004-09-29/773호>

입력일 : 2004-10-08 11:12

“집현전 학자들 한글창제 무관”


훈민정음에 대한 오해

한글창제는 지금까지 신숙주와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만들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이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없는 쪽으로 굳혀지고 있다.


한글창제 이후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이 집현전 학자들이며, 당시 집현전 부제학으로 실무담당을 맡고 있던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조차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상소를 올리는 것 등의 정황으로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이 돕기는커녕 몰랐던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1443년 12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선언할 때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비밀리에 추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성삼문은 한글이 창제될 무렵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신숙주는 창제 2년 전에 들어왔지만 그 다음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록에도 전혀 그런 말이 없다. 잘못된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세종께서 이런 사실을 알면 통탄할 것”이라는 여증동 경상대 국문과 명예교수의 말처럼 집현전 학자 창제설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따라서 이들 집현전의 소장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종의 명을 받들어 훈민정음의 보급에 앞장섰을 뿐이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

입력일 : 2004-09-25 11:14

“집권 초 억불…중반이후 호불로 전향”


세종대왕과 불교

태종에 이어 1418년 즉위한 세종은 강력한 유교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즉위 초기 배불(排佛)에 앞장섰다. 불교를 약화시키기 위해 7개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는가 하면 “불교를 점진적으로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공적으로 유교를 내세웠지만 사적인 부분에서는 초기부터 불교에 대한 애정이 나타난다. 집권 초 사찰의 건립 보수에 앞장섰는가 하면 왕실불교를 일으키는데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


세종은 또 정권 중후반기인 즉위 20년 무렵 친불교적인 성향을 본격화하면서 조정 대신들과 불교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집권말기에 이르러서는 왕실에 내불당을 건립(즉위 30년)하는 등 적극적인 호불(好佛)정책을 추진했으며 반발하는 대신들에 대해 오히려 강력히 제지하기도 했다.


실제 세종 즉위 28년 3월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대군들이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편찬하겠다고 하자 이를 공식적으로 허락한다.


그러나 당시 우부승지 이상철, 좌승지 황수 신 등이 중심이 된 조정 대신들과 전국의 많은 유생들은 세종대왕의 불교 신봉을 비판하는 상소를 잇따라 제기했다. 그러나 세종은 “경들은 고금의 사리에 통달해 불교를 배척하니 가히 현신(賢臣)이라 이를 만하다. 나는 의리(義理)를 몰라 불법을 믿고 있으니 가히 무식한 임금일 것이다.…이제 그대들의 뜻을 훤히 알겠으니 번거롭게 다시 청하지 말라.”며 대신들을 비꼬기도 했다.


세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가) 공자의 도(道)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주자가 잘못됐다고 했으나 이는 석가모니를 잘 몰라서이며, 천당지옥·사생인과는 명확한 이치가 있으며 결코 허탄(虛誕)한 것이 아니다”라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이 같은 세종의 자비와 지혜가 결국 뭇백성들의 눈을 뜨게 한 글을 만들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 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오영 기자


<2004-09-29/773호>

입력일 : 2004-09-25 11:15

“한글창제 주역은 신미스님”

한글날 특집‘훈민정음과 불교’

 梵字-티베트어에 능통…불경 간행 주도

세종이‘존자’칭호…‘집현전 참여’ 기록도

억불 정책으로 공헌가려져…재조명 있어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손꼽히는 한글.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분명하지만 한글의 기원이나 문자를 만드는데 기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의문점이 남아있다.


본지가 한글날 558돌을 기념한 특별취재에 따르면 훈민정음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혜각존자 신미(信眉, 1405?~1480?)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을 뿐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특히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2300여 쪽은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를 훈민정음으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신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도 크게 기여했을 거라는 주장이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먼저 세종대왕과의 관계다. 비록 신미대사가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세종이 죽기 5년 전인 세종 28년(1446)이지만 그 관계가 대단히 친밀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죽기 몇 달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닌 윗사람의 예로 신미대사를 대하고 있으며, 당시 신미대사가 머무르던 속리산 복천암 불사를 지원하고, 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존자’라는 명칭이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고, 더구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 영산 김씨 족보에 ‘수성(신미대사)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과 신미대사의 친동생이자 독실한 불자였던 김수온이 한글창제 이전에 이미 중앙에 진출한 상태였다는 점도 이와 관련된다는 가설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는 불교의 신성 숫자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은 새로운 문자의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김광해 서울대 교수) “방대한 양의 불경이 한글이 창제 된지 얼마 안 되는 기간에 한문본이 편찬되고 번역까지 됐다. 이는 한글 반포 이전부터 불경에 정통하고 있었으며, 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운용법과 표기법에 통달하고 있던 인사들이 있어서 이 사업을 추진했다는 증거다.”(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 같은 기존 학자들의 주장도 그 당시 대표적인 학승이었던 신미대사를 상정할 경우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특히 얼마 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한글 기원은 고려불경의 각필부호”라는 학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견해가 많다.


지난 30년째 신미대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오고 있는 복천암 주지 월성 스님은 “억불숭유의 시대로 말미암아 신미대사의 공헌은 철저히 가려지고 삭제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라도 그 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신미대사는?

신미대사는 부친이 태종 때 정승까지 지낸 양반 가문인 까닭에 입산 전 유학 경전을 섭렵할 수 있었으며 출가 후에는 대장경에 심취했다. 그러나 한문 경전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어와 티베트어를 직접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세종, 문종, 세조 때에는 경전번역 등 불사를 이끌었으며 예종이 불교탄압하려 할 때는 언문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2004-09-29/773호>

입력일 : 2004-09-30 08:40

세조가 신미대사에게

“내가 왕이 된 것은 오직 대사의 공”

순행(巡行) 후 서로 있는 곳이 멀어지니 직접 목소리를 듣고 인사드리는 일도 이제 아득해졌습니다. 나라에 일이 많고 번거로움도 많다보니 제 몸의 조화가 깨지고 일도 늦어집니다. 그렇다고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항상 부처님께 기도를 해주시고 사람을 보내어 자주 안부를 물어주시니 다만 황감할 뿐입니다. 행여 이로 인해 제가 멀리서 수행에 전념하고 계신 스님에게 폐를 끼치고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원각사의 일은 널리 들으신 바와 같고 끝까지 서술하기는 곤란합니다. 저의 지극한 정성에 부흥해 스스로 편안하게 머무르시기를 바라옵니다.

금을 보내드리오니 좋은 곳에 쓰시기를 바라며, 불개(佛盖)와 전액(殿額) 그리고 향촉 등 물건을 아울러 받들어 올립니다.


심신의 병 치유해 준 스승으로 섬기며 불교 외호신장 자임


세조(1417~1468)는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불교 옹호정책을 실시한 임금이었다. 간경도감을 세워 수많은 경전을 배포했으며, 각종 불교행사를 열어 스님들의 위상을 높이는데 앞장섰다. 또 원각사 및 비구니 사찰 정업원 등을 창건하고 심지어 일본 불교의 부흥을 위해 사찰중수금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불교를 억누르기 위해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공세를 펼치던 사대부에 기꺼이 맞서는 방파제 역할을 자임했던 것이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나라에서 불교도임을 당당히 밝혔던 세조. 이러한 배경에는 자신이 그토록 존경했던 스승 혜각존자 신미 스님(1405?~1489?)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실제 세조는 자신의 수기에서 “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존자를 만났고 그 분으로 인해 늘 깨끗한 마음을 품고 어둠에 물들지 않았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모두 대사의 공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세조 10년(1464)에 쓰인 이 편지에서도 신미 스님을 향한 세조의 지극한 마음은 잘 나타나고 있다. 사실 이 순행은 세조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뿌리 깊은 죄책감을 복천암에서 극복할 수 있었고, 신미의 권유로 오대산 상원사 중창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신미도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을 통해 “우리 성상(聖上)이 천명을 받들어 만백성을 편안케 하시니 속인이나 승려나 누가 그 은혜를 갚사오리까”라는 감사의 뜻을 전했다.


세조의 상원사 지원사업은 다음해 불사 회향의 참석으로 이어지고 여기에서 세조는 문수동자를 만나 그 오랜 고질병인 피부병을 치료하게 된다. 이렇듯 신미는 세조에 있어 자신의 몸과 마음의 병을 낫게 해준 은인일 뿐 아니라 자신이 성군의 길을 가도록 격려와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선지식이기도 했다.


범어를 비롯한 인도문자와 티베트에도 정통했으며, 불교경전에도 두루 해박했던 신미. 그는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23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집을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신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신미는 쉬운 한글경전의 간행과 사찰 불사 등으로 불교가 민중 깊숙이 스며들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려 애썼다.


그러나 신미의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이나 법문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이름을 남기기보다 일을 앞 세웠던 그의 고결한 인품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을 듯싶다. 이 편지는 1970년대 처음 발견돼 단국대 이호영 교수에 의해 학계에 소개됐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취미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찰  (0) 2011.10.03
세계의 왕족들  (0) 2011.09.30
아마존 부족들의 영상 10편  (0) 2011.09.25
물고기종·철새 몰아냈다   (0) 2011.09.25
동자승  (0) 2011.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