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한국사회는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입적(入寂)하여 동월 13일 송광사에서 다비식(화장)을 치룬 박법정(朴法頂)스님을 추모하는 일부 고해대중들이 다투워 추모사를 하고, 눈물짓고 있다. 그것은 대통령 임기내내 자신이 목숨바쳐 보위(保衛)해야 할 대한민국과 국민들의 안보정서는 아랑곳 없이 대북 퍼주기로만 임기를 마치다시피 하고 죽은 DJ, 노무현에게 보였든 인정 넘치는 굿판같다. 법정스님을 향한 추모사는 신화로 변할 지경에 이르렀다. 왜 이러한 현상이 오는 것일까?
고해대중의 일평생 자나깨나 화두는 돈이다. 고해대중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론(論)에 감격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돈 때문에 울고 웃고, 양반이 되고 천민이 되고, 성공과 실패자가 되고 천인공노할 범죄자가 되고, 남자는 지조를 꺾고, 여자는 정조방매(貞操放賣)까지 하는데, 무소유론에 심취하여 책을 구매하려고 다투워 경쟁하고, 소장하여 두고두고 독서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제 마음대로 돈을 벌지 못하거나, 돈은 많지만, 보시하기는 싫고, 마음으로라도 무소유사상속에 '버리고 떠나며', '맑고 향기롭게' 관념적으로 살아보겠다는 심산(心算)인가? 아니면 돈에 대한 집착을 떠나 보시를 시작하려는 것인가?
글은 진짜 그 사람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작가는 돈을 위해 국화빵, 붕어빵적 글을 써 낙양의 지가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작가의 자유다. 작가의 의도대로 고해대중이 정신없이 돈에 대한 화두를 내던지고 무소유를 연호하고, 감격하여 훌쩍이며 합창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가산(家産)과 가족(家族)을 정리하고 자연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 결론인가? 아니면 고달픈 인생에 관념적으로 한번 해보는 것인가?
60년 중반, 필자는 해인사에서 법정스님을 처음 해후했다. 그는 해인사 해우소(解憂所) 가는 길 옆 건물의 끝방에 기거하면서 책을 읽고 글쓰기 공부에 매진했다. 그의 글쓰기는, 첫째, 사찰환경과 자연에 대한 찬미였다. 둘째, 무소유, “내 호주머니는 먼지 뿐일세”식의 글을 썼다. 그 다음, “버리고 떠나기”, “맑고 향기롭게”를 연속 발표했다. 그는 마침내 신조어(新造語)의 글쓰기로 대성공했다. 명성과 돈이 따랐다. 돈 많은 여신도들이 후원인이 되려고 경쟁했다. 예나 지금이나 승속(僧俗)간에 유명인사에게는 일부 여성들이 설치는 것 아니든가? 해인사 밑 숙대 재학생인 미스 유가 정성을 다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노래에 감동받은 여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법정스님에게 1200억 상당의 대원각(大苑閣)의 부동산을 바치는 요정주인이 등장했다. 15세 동기(童妓)출신이다. 그녀는 70년대 일인(日人)들을 위한 한국 제일의 기생관광의 대모인 대원각 주인 김영한씨이다. 그녀는 대원각에서 가난한 한국의 딸들에게 일인들을 위해 가무(歌舞)하게 하고 술 따르게 하고 몸 팔게 해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법정스님을 만나 업보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갈 수 있다는 법어에 일평생, 술 팔고, 몸 팔아서 번 돈을 일순에 바치는 결심을 했다고 전한다. 여성은 종교적으로 겁을 주면 큰돈을 내놀 수 있다는 것을 필자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법정스님에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 여사가 후원회장으로 등장했다. 불교계는 물론 세간에 부러움의 화제가 일어났다. 법정스님이 입적하기 전 삼성병원에서 입원가료를 받아왔는데, 병원비 6천2백만원을 홍라희 여사가 전액 지불했다는 언론보도는 또 한번 세인을 경탄케 했다.
어느 정부 고급 공무원 부인은 무소유를 보고는 감동하여 남편의 3개월치 월급의 돈을 남편 모르게 법정스님에게 송금했노라는 자랑을 하며, “돈이 없는 분이라서 보냈는데 잘했지요?”라고 필자에게 문의해왔다. 남편은 뼈골이 빠지게 돈 벌어 가정에 내노니 부인은 괴상한 내조를 하는 것이다. 승려의 “호주머니에 먼지 뿐일세”가 돈많은 여신도들의 송금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것을, 필자는 예전에 미쳐 깨닫지 못했다.
“내 호주머니에는 먼지 뿐일세”의 무소유 노래는 급기야 불교계를 뒤흔들었다. 부지기수의 승려들이 여신도들을 상대로 무소유 노래를 부르는 전성기를 일으킨 것이다. 법정스님처럼 1000억이 넘는 보시를 받을 수 있고, 재벌회장 부인을 후원회장으로 만날 수 있다는 웃지 못할 사행심이었다. 어쨌든 “호주머니에 먼지 뿐일세”의 노래는, 인정많은 보살님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신통한 주술의 힘을 보였다. 그러나 기가 찬 것은 백화점을 소유한 모 승려가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신도들에게 자신의 무소유사상을 강변하며 신도들의 지갑을 열게 한다는 소식이다. 사기협잡이요, 추태가 아닌가? 진짜 무소유를 실천하는 승려들은 무소유를 말하지 않는다.
법정스님은 진짜 무소유한 일생을 살았을까? 모두 버리고 떠나서 그의 호주머니에는 먼지 뿐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불교계의 어느 승려가 따를 수 없는 유소유(有所有)의 행복을 누렸다. 무소유는 그의 희망사항을 노래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는 세계 여행에 자주 나섰다. 그는 출판사에 불같이 호통을 치면서 인세(印稅)를 챙겼다. 수십억의 인세와 신도들의 보시금, 사찰 방문 때의 보시금, 길상사에서 회주스님께 드리는 약값조의 보시금 등으로 어렵지 않게 살았다. 그런데 신화같은 전설을 만들어 우상화하여 이득을 보려는 출판사나, 일부 승려들이 낡은 옷 한 벌을 세상에 보여주며, “이것이 그분의 전 재산이라오” 라는 홍보는 불교계에서 늘 써먹는 진부하고 고전적인 홍보로 고해대중은 식상해 한지 오래이다. 인정속에 눈물로 석별하는 고해대중에게 진실해야 한다.
법정스님의 돈은 어디로 갔을까? 신화같은 찬사의 절정은 법정스님의 수십억 돈은 수혜자를 알 수 없는 불우한 학생들에게 학자금 보조로 지금 되었다고 한다. 불우한 학생 학자금 보조를 해주었다는데 이빨 가는 자가 있을까? 언제나 법정스님의 보시는 익명이었고, 수혜자도 이름이 없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을 떠나 맑고 향기롭게 모두 지원하고, 법정스님은 누더기 옷 한 벌 남기고 떠났다는 측근들의 주장이다. 법정스님에 관한 영화라도 제작해야 할 기막힌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눈물 많고 인정 많은 고해대중은 훌쩍이며, 성자(聖者)의 무소유행에 찬가를 부르며 신화적인 이야기를 입으로 전할 수밖에 없다.
법정스님은 불교 이외에 어떠한 사상을 가진 분일까?
그는 목포상고의 선배인 DJ를 추종했다. 자신의 입으로 DJ에게 송금을 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의 글은 자유대한을 사랑하고 보위하는 글은 없다. 세습독재체제 속에 수백만이 비민주, 무인권속에 기아로 죽어가는 것을 환히 알면서, 김일성, 김정일의 폭압정치에 대해서는 꾸짖는 것은 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박정희를 독재자로 증오했다. 자유민주를 위해 월남으로 간 장병들을 증오했다. 왜 미국편에서 베트남 공산당에 총부리를 겨누냐는 지론이다.
그는 진보적 승려들이 부안방폐장, 새만금, 천성산, 사패산 등 국책사업을 저지할 때, 배후의 총사령관이었다.
사패산 농성에는 현장에 나타나 대정부 투쟁을 독려했다. 법정스님이 건재했다면, 이명박정부의 ‘사대강 살리기’는 큰 암초를 만났을 것이다. 버리고 떠난다면서 왜 그리 집착했을까?
법정스님은 불교계 내부에도 정치필봉을 들어 선전선동에 나섰다. 94년, ‘4,10 승려대회’ 때 자신이 지원하는 승려들이 종권을 잡게 하기 위해 투쟁적으로 나섰다. 결과는 어떤가? 당시 송서암 종정을 내쫓고, 당시 서의현 원장을 멸빈케 되었으며, 임원두 종정 사서실장을 멸빈 시키는 등 많은 승려들이 중징계의 화를 입었다. 비민주 무인권적인 보복정치인 중징계를 받은 승려들을 사면받게 하기 위해 필자는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법정스님은 단 한줄의 사면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은 냉혹한 처신을 했다. 부모형제를 떠나서 부처님께 귀의한 같은 승려들을 무슨 권한으로 멸빈을 시키는 것인가? 청춘을 산사에서 보내고 난후 다 늙어 조계종에서 내쫓으면 늙은 몸을 이끌고 어디로 가야할까? 법정스님은 냉혹했다. 불면나찰(佛面羅刹)은 무엇인가?
고해대중은 법정스님의 신조어,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 ‘맑고 향기롭게’, 로 감동받아 찬사 가득한 추모사가 충천해지고 있다. 명작소설 ‘성녀 아도라타’가 생각난다. 창녀를 땅에 묻고 비석에는 ‘성녀 아도라타’가 묻혀 있다고 주장을 하니 추모객이 정사진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법정스님의 입적을 보면서, 통도사 극락전의 조실 김경봉(金鏡峰)대선사의 입적 직전 법어가 생각난다. 경봉 대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한바탕 연극이다. 나는 중(僧) 역활 잘하고 간다. 그대들은 사바세계(인간세상)를 무대로 멋지게 연기하기 바란다.” 필자는 경봉대선사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모(李某), 처자있는 승려가 비구승인척 연기를 하고, 삼보정재를 훔쳐 수백억씩을 착복하여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호주머니에는 먼지 뿐일세”의 구차한 노래로 여신도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연기이다. 무식한 자가 깨친 것처럼 헛소리 하는 연기도 재미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 덕에 풍요롭게 행복하게 살면서, 빨갱이 노릇하는 연기는 통탄스러운 일이 아닌가?
고해대중은 어떤 수행자를 존경해야 할까? 자기 참마음이 부처(是心是佛)다는 것을 알면 된다. 그러나 굳이 마음속에 스님의 상을 존경하고져 한다면, 사명대사와 같은 분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권한다. 그는 유생들의 핍박속에도 임난(壬亂)이 나자 불교가 존재하는 조국 조선과 민족을 구하고져 신명을 바쳤다. 선조 37년 6월, 사명대사는 일본에 건너가 전쟁이 없는 강화조약을 맺고 귀국길에 일본군에 강제 끌려간 포로 3천6백여명을 데리고 귀환했다. 불귀의 객이 될 줄 알았든 포로들은 얼마나 환희용약 했겠는가? 당시 조선은 사명대사의 능력에 경탄했다.
오늘날 불교의 호국론(護國論)은 불교가 존재하고 중흥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 보위다. 예나 지금이나 위국헌신(爲國獻身)하는 불제자들이 참된 불제자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할 것이다. 미사여구(美辭麗句), 언어문자(言語文字)를 내세워 세상을 현혹하고, 이중인생(二重人生)의 연기를 잘하는 자에 박장대호(拍掌大呼)하고, 울며 돈바치며, 추종할 것은 없다.
끝으로, 저승길에는 부처도 갔고, 조사도 갔다. 일세를 빼어난 글쓰기로 명망을 떨쳤든 법정스님도 갔다. 필자도 갈 것이다. 죽어 한줌 재로 화하여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인정많은 고해대중의 찬사속에 법정스님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고해대중이 찬사속에 오열하며 석별의 정을 표하는 따뜻한 마음을 알고 있을까? 법정스님이 이땅에 다시 온다면, 자유대한을 사랑하고 보위하며, 불교중흥 속에 자비를 실천하는 문장가로 오기 바란다. ◇
李法徹(bubchul@hotmail.com)
| | 朴正熙는 세계 5大강국의 길을 열었다.
민주화를 앞당긴 것도 朴正熙의 功이다.
[월간조선 편집자 注]「그랑프리」라는 필명을 가진 사람이 쓴 『박정희는 살아있다』 라는 글이 인터넷상에 널리 퍼지고 있다. 원래 이글은 8월초 동아닷컴(www.donga.com) 자유토론장에 올렸던 글이다. 이글을 거의 원문대로 발췌해 싣는다. 중간 제목 등은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朴正熙의 진짜 功績
사람들은 박정희의 허물은 정말 꼬치꼬치 잘 안다. 그의 만주군 경력, 남로당 경력, 고문, 탄압에서부터 시바스 리갈에 연예인들과의 술자리까지 좔좔 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박정희의 공은 그만큼 잘 모른다. 그저 경제발전을 했다느니, 조국근대화를 했다느니, 보릿고개를 없앴다느니 하는 정도로 막연하게 알고 있다. 하루하루의 삶이 바쁜 생활인들이나, 맨 날 책만 본다고 으스대는 자들이나 별 차이가 없다.
한국인들은 박정희와 더불어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라는 한민족 5000년 역사상 유례없는 보물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대부분 모르는 것 같다. 오늘날 한국이 영위하는 철강, 기계, 조선, 자동차, 전기, 전자, 반도체, 정보통신, 석유, 화학과 같은 산업들은 선진국들이라고 다 영위하는 산업구조가 아니다. 선진국들 중 에서도 오직 강대국들만이 영위하는 산업구조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이룩한 나라는 전 세계에 단하나 - 한국밖에 없다는 사실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실력 없고 보잘 것 없는 한국의 기업들이 박정희의 지휘에 따라 경제 전쟁터로 돌격한 이래, 40년 넘게 강대국들의 골리앗기업들과 싸워 이겨 마침내 이룩하게 된, 온통 피땀과 피눈물로 범벅이 된 승전기념탑이다.
이 강대국형 산업구조는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시대이래로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태리, 일본, 소련정도의 일곱 나라밖에는 가져 보지 못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최근에는 영국, 이태리, 소련마저도 이 대열에서 탈락했다. 한국을 포함하여 미국-일본-독일-프랑스밖에는 가진 나라가 없다.
중국이 뒤늦게 이 대열에 끼어 보려고 한국의 설계도면을 훔쳐다 배를 만들고, 자동차기술을 배우려고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려다 쌍용차노조에게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LCD, PDP를 자체기술로 개발하려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한국기업들을 인수할 수밖에 없었다.
동북아시아의 강대국 고구려의 멸망이래로, 한국은 주변 강대국들에 짓밟혀 눈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 대대로 공녀-갈보-화냥년-정신대-전쟁노예-환관내시-징병-징용 등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20세기는 청일전쟁-러일전쟁-일제식민지-6.25전쟁-민족분단으로 한국사 5000년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눈물의 역사를 극복하고 희망차고 당당한 21세기로 나가려면, 말로만 민족자주를 외쳐서는 되지 않으며, 우리 스스로가 주변 4강과 어깨를 겨루는 다섯 번째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
강대국형 산업구조만이 우리를 다섯 번째 강대국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한 물적 기반을 우리는 박정희시대에 건설할 수 있었고, 나아가 내실 있는 자주국방도 추진할 수 있었다. 박정희시대에 한국은 고구려에 이어 다시 강대국의 꿈을 키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고, 1천년이상 이어져 온 눈물의 역사를 끊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한국인들은 박정희의 경제발전과 대규모 중산층창출로 말미암아 정치민주화마저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민주화는 레닌, 모택동, 호지명, 간디, 네루, 만델라 같은 세계적인, 역사적인 獅子들도 그들의 나라에서 이루지 못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이 어렵고도 어려운 일을 겨우 여우수준에 불과한, 한국의 민주화인사들이 이룬 것이라고 행여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박정희의 성공한 경제발전이 대규모 중산층을 창출시켰고 그 두터운 중산층이, 박정희가 죽은 이후, 정치민주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박정희가 한국의 정치민주화의 기반마저도 실질적으로 만들어 낸 한국의 호랑이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박정희는 경제발전, 정치민주화, 자주국방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인정하듯이 박정희는 경제발전과 자주국방이라는 두 마리 토끼는 확실히 잡은 사람이다. 정치민주화를 오히려 후퇴시켰다고 비난하는데, 박정희의 성공한 경제발전과 두터운 중산층 창출이 정치민주화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정치민주화마저도 0.9마리까지는 박정희가 잡은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민주화도 朴正熙의 功
우리는 박정희시대의 피눈물 겨운 노력으로 강대국형 산업구조라는 보물을 창출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이 될 수 있었다. 국민소득은 1만불을 넘어 섰으며, 세계적으로도 부끄럽지 않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마저도 이룩하였다. 한국사나 세계사 5000년을 둘러보아도 이만큼 단기간 내에, 50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이토록 비약적으로 향상된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가질 희망과 비전은 자명해진다. 아무나 갖지 못한, 그 귀한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양적으로 확대하고 질적으로 심화시켜 나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하루빨리 남북통일을 이루고 세계 5위권의 강대국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에 강고한 한미동맹을 확실히 한다면 무엇이 걱정인가?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이 두려울 것인가? 일본의 독도망언이 두려울 것인가?
뭐가 강대국형 산업구조의 양적인 확대인가? 우리가 비록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자랑하지만, 아직 전세계공업생산량에서의 점유율은 2%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미국이 25%, 일본 16%, 영국. 프랑스. 독일이 각각 6-9%, 중국이 4%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이 점유율을 2030년까지 10%수준이상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 양적인 확대다. 앞서가는 나라들도 끊임없이 노력하니까 우리는 더욱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니, 과거사청산이니 하는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
뭐가 질적인 심화인가? 우리가 핵심기술, 원천기술이 많이 부족하여 핵심부품 수입, 로열티지불이 많다는 것은 우리의 취약점으로 많이 지적되어 왔다. 늦게 출발한 자로서 어쩔 수 없는 약점이다. 이러한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개발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질적인 심화다. 그리고 진대제장관의 IT 839계획이든, 황우석박사의 생명공학이든, 팔팔 뛰는 젊은 물리학자들의 나노공학이든 투자를 서두르는 것도 질적인 심화다.
중소기업육성, 이공계육성은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런 투자를 꾸준히 하다보면 짱짱한 중소기업들이 부지기수로 탄생하게 되며 이공계우대는 자연히 이루어진다.
이리 되면 국민소득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2030년까지 5만불이 될 지, 10만불이 될 지, 그 이상이 될 지, 그 누가 알 것인가? 남북통일이 되어서 먹여 살릴 식구가 갑자기 2000만 명이 불어 난다하여도 별로 걱정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경제가 인권이고, 민주주의고, 복지고, 문화고, 교육이고, 의료고, 환경보호다.
내일 당장 먹을 게 없어 몸 팔고, 피 팔고, 장기 팔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인권이 있는가? 생활고로 한강 투신, 가족 동반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인권이 있는가? 카드빚에 몰려 연변-동경으로 도망가서 몸 파는 한국 주부들에게 인권이 있는가? 반면 돈 많은 사람들이 어디 가서 사람대접 못 받고 다니는 것 봤는가?
못난 놈들이 부자와 거지, 사회적인 강자와 약자를 그대로 놔 둔 채, 법률적으로, 정치적으로 거지와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겠다고 말로만 난리치는 법이다. 이것은 저급한 인권보호이며 성공하기도 쉽지 않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 온 것은, 이런 식의 인권보호를 하겠다고 말로만 난리를 쳤던 인간들이 인권보호의 특출한 성과는 없이 대학교수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되는 것이었다. 이 따위 허위와 고등사기, 인권 보호사기 에서 깨어 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부자가 민주주의를 한다.
박정희나 이광요(리콴유)처럼 똑똑한 사람들이 거지를 모조리 부자로 만들 궁리를 한다. 아예 인권을 보호해야 할 껀덕지를 없앨 궁리를 한다. IT, BT, NT등 상상을 초월할 생산력발전을 초래할 기슬들이 이미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들 분야에서 선두주자인 한국이 '모두다 부자 만들기'의 욕심을 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배기 인권보호다.
돈많은 중산층이 많아지면 인권신장이나 민주주의는 자연히 성숙해 진다. 부자들이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지, 거지에게 민주주의는 없다. 거지에게는 항상 왕초와 꼬붕밖에는 없는 법이다. 거지왕초 김정일이 한 놈 밑에 불쌍한 파리 목숨 꼬붕들의 모습을 우리는 항상 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돈이 많아야 복지고 문화고 교육이고, 의료고, 환경보호고 다 잘되는 법이다. 항상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지, 언제 사람이 없어 못 했나? 방법을 몰라 못 했나?
입에 민주, 반독재, 인권을 달고 다니던 그 잘난 민주화대통령들이 모두 집권기회를 가졌지만 도대체 그들의 성취는 무엇이었던가?
김영삼-김대중 이래로 노무현까지 10년이 넘었지만 나온 실적이라고는 '외환위기-5억불 대북비밀송금-노벨평화상 챙기기-소련, 동구의 원조빨갱이들 깡그리 멸종했는데 지겹고 어이없는 이념갈등, 남남갈등-외국인, 한국인 모두 투자 기피하기-있던 공장 중국으로 도망가기-청년실업증가-신용불량자 대거 양산-생활고를 비관한 자살, 가족동반자살 급증-한미동맹 흔들기-한총련합법화-송두율사건 일으키기-간첩, 빨치산을 민주화영웅 만들기-멀쩡한 국가보안법 폐지-친일청산, 과거사의 끊임없는 청산-열린 우리당의 20년 장기집권을 위한 충청권천도 올인-체제우위경쟁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한국에게 해괴망측한 연방제통일을 억지로 떠먹이기'뿐이지 않은가?
요새 경제는 너무 어렵고, 국가의 정체성이 위기인데다, 우리의 미래 비전이 뭔지 모르겠다는 얘기는 많다. 10년이 넘는 혼미 속에서, 우리는 박정희시대의 성취도 망각해 버리고 그 후 계속 되었어야 할 우리의 임무, 희망, 비전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다. 이렇게 암울하고 방황할 때, 답답한 민중들은 다시 박정희를 간절히 생각하게 된다.
이때 박정희는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혼미에 불호령을 내리며, 우리가 잃어버린 미래의 희망과 비전을 다시 일깨우며, 우리의 바로 옆에, 이토록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출처] 월간조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