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의 유래
장기는 약 4,000여 년 전에 인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인도의 불교도들이 전쟁이나 살생을 금하는 계율 때문에 인간본연의 어떤 파괴본능을 달래고,
수도를 하는 시간 외에 잠시라도 세속에 흐르기 쉬운 잡념을 떨어버리기 위해 전쟁을
모의(模擬)한 소재로 장기를 발명하였다고 하며,
또 일설에 미얀마 사람들은 자기네의 고대국 타이링의 왕비가 발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왕을 지극히 사랑한 왕비가 전쟁만을 일삼고 늘 싸움터에만 나다니는 왕을 궁중에 머물게
하기 위해 궁리 끝에 만든 것이라고 주장 하고 있다.
물론 말의 형태가 달랐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장기의 발상지는 중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장기조각(말) 자체가 초(楚), 한(漢)으로 되었고,
초패왕 항우(項羽)와 한왕 유방(劉邦)의 각축전을 모방한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약 2,000년 전 삼국시대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장기의 연원은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지며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상희도법 象戱圖法》에는 장(將)。사(士)。보(步)。차(車)。마(馬)。노(弩)。포(포) 등의
말씨가 있어서 오늘날 유행되고 있는 장기와 비슷했다.
지금 유행되고 있는 중국장기는 기원 10세기 중엽에 후주(后周)의 무제(무제, 951~953)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중국 말로 장기를 흔히 ‘상희(象戱)’ 또는 ‘상기(象棋)’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말하는
‘상(象)’은 코끼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관한 여러 가지 도구와 인마(人馬)의
형상을 상징하였다고 한다.
《사해》(辭海)의 해설을 보면 중국장기는 북송과 남송의 교체시대에 완전히 틀이 잡혀
광범히 유행되었다고 하며 조선의 《고려사。악지》에는 예성강노래의 유래와 더불어
송나라 상인과 고려사람이 며칠 동안 연거퍼 장기를 두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고려사。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의 기재에 의하면 〈예성강곡(禮成江曲)〉이
생겨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장기 잘 두는 송나라 상인 하두강이 고려의 예성강에 장사차로 왔다가 예성강변 벽란도
주막집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주막 주인에게 장기내기를 걸었다.
하두강은 일부러 자꾸 저주면서 그의 배에 싣고 온 명주를 주막 주인에게 바쳤다.
며칠이 지나자 하두강의 배에 가득했던 명주는 모두 주막 주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주막 주인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하두강은 마지막으로 주막 주인에게 수작을 걸었다.
“여보. 나는 이제 밑천이 다 나갔으니 마지막으로 장기 한판에 모든 것을 걸고 승부를 냅시다.”
“좋소이다.”
“내가 지면 저 배를 몽땅 주인장한테 넘기겠소.
만약 주인장께서 지면 따간 물건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 부인까지도 내게 주어야 하오.”
이 말에 주인은 쾌히 승낙하였다. 부인까지 걸고 하는 한판 승부의 장기에서 하두강은
신기를 발휘하여 마침내 주막 주인을 이겼다.
주막 주인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실행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부인과 작별인사를
하고 휑하니 나가 버렸다.
송나라 상인에게 팔려가는 그 고려 여인은 부두에 서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장기에 미쳐 사랑하던 부인까지 잃어버린 주막집 남편은 발을 동동 구르며 후회했으나
배는 점점 멀어져 갈 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다가 마침내 어디론가 정처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부인을 실은 배가 망망대해 뱃길로 접어들자 갑자기 웬일인지 큰 배가 한 치도 앞으로
가지 못하고 뱅뱅 맴돌기만 하였다.
영문을 알아차린 하두강이 빼앗아 온 그 여인을 벽란도에 돌려보내서야 배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본국으로 돌아온 여인은 행방이 묘연한 남편을 찾아 방방곡곡을 이잡듯이 뒤졌으나
끝내 남편을 찾지 못하였다.
〈예성강곡〉은 바로 그 여인이 울면서 남편을 찾아 헤매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송나라 상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장기가 일찍이 많은 고려 사람들의
취미생활에 이바지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바 있는 최남선(崔南善)의 저서 《백과사전》〈유희편(遊戱篇)〉을
보면 현행 장기는 중국 송나라 때 고려로 전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기에 관한 문헌으로는 서거정의 글에 의하면 세종의 중신 김석정(金石亭)과
김예몽(金禮蒙)이 상희대국(象戱對局)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추측하건대, 장기가 전래된 후 조선시대에 이르도록 양반계급이나 고관들만이
즐기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장기를 두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서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시골 노인들의 소일거리로 크게 유행되었다.
선조시대의 문헌 《연려실기술》에는 모사와 군신들이 장기를 둔 데 대한 기록이
여러 군데 나타나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인 노사신이 장기를 놀다가
‘차’만 잡히면 상대방에게 애걸복걸하여 물렸다고 해서 “노정승의 ‘차’처럼
불로장생 했으면 좋겠다”는 속담까지 생겼다고 한다.
장기와 관련하여 우리 민족에게는 지배계급의 오만성과 노동인민의 슬기로운 지혜를
대조적으로 보여 준 민담도 있고 멋들어진 민요도 있다.
광복 후 늦은 감이 있기는 하나 1956년 10월 10일, 장기계의 뜻있는 유지들이 모여
장기의 기도를 확립하고, 이제는 민족오락으로, 또는 지능오락으로까지 애호를
받게 된 장기의 오묘성(奧妙性)을 더 높여 보다 체계적으로 장기의 기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 기도원을 창설하였다.
다시 67년에는 한국장기원으로 개칭하였고, 73년에 와서 한국장기협회로 다시
개칭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도는 고대 최고의 문명국이며, 이 놀이는 고도의 지능을 요하는 오락인 까닭에
장기는 인도에서 발명, 발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게 본다면 장기는 적어도 3,000~4,000년 전에 인도에서 발명, 사용되었고,
그것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한국적인 장기로 정착된 것으로서,
그 시기는 신라 말기에서 고려초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이 장기는 인도장기·중국장기·일본장기로 다소 다르게 고정되었고,
서양으로 퍼져간 것이 ‘체스’라고 하는 서양장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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